고양이 삐침 현상에 관한 논문
돼지가 삐쳤습니다. 벌써 일주일 째 제 곁에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말이죠. 그 계기가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삐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일주일이란 기간은 지나치게 뒤끝이 긴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캣초딩도 아니고 성묘씩이나 되어가지고 이해심을 좀 길렀으면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사건은 새 낚싯대 장난감을 구매하던 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평소 돼지가 낚싯대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방법은 다소 남달랐습니다. 둔한 몸짓 탓에 쉽게 잡지 못 하는 대신 한번 잡으면 사냥개 마냥 잘 놓아주지 않기로 유명했는데요. 그러다보니 쉽게 늘어나고 휘어지는 낚싯대 장난감 특성상 구부러지고 부러지기가 일쑤였죠. 이번에도 역시 새로운 낚싯대를 산 기념으로 주인과 하수인은 정신없이 날아오르고 정신없이 휘두르는 광란의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다른 말이지만 저는 요즘 새로운 운동기구를 구매해 하루 한 번은 꼭 운동을 해야겠다 다짐하던 중이었으며 운동의 욕구는 설거지를 할때도 청소를 할때도 계속되었습니다. 돼지를 놀아줄때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놀아주는 김에 나도 운동하자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심산으로 그만 힘 조절하지 않고 낚싯대를 휘둘러버린게 화근이었습니다. 딸랑이던 방울 끝이 둔기로 변해 돼지의 코를 흠씬 후드려 패버렸습니다. 퍽 소리가 울려퍼진 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일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니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듯 나를 보던 돼지의 그 눈은 지금도 꿈에 나올까 섬뜩합니다.
어느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꺼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려고 그랬던게 아니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저와 물끄러미 저를 쳐다만 보던 돼지. 먼저 행동을 취한 건 돼지 쪽이었습니다. 일언반구도 없이 몸을 돌려 침대밑으로 들어갑니다. 가스검침원이 찾아오거나 보일러 수리기사가 방문하는 등 이방인이 찾아올때마다 잽싸게 몸을 숨기던 그 침대 밑 말입니다.
좋아하는 닭가슴살 큐브를 침대 밖에서 흩뿌려 봐도, 좋아하던 공 장난감을 침대 밑으로 굴려봐도, 사료통으로 드럼을 쳐도 돼지는 침대밑에서 꿈쩍도 하지않았습니다. 내가 괴한에게 당해도 저것은 마중도 안나오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자만했습니다. 한번 고양이의 마음이 돌아서면 평생 못볼 각오 해야된다는 말은 익히 들은 바 있으나 우리 고양이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 혼자 발에 걸려 넘어져놓고 내가 민줄 알고 하악질 했던걸 제외하면 하악질 한 번을 한 적이 없고, 평소 부르면 사료를 먹다가도 사료를 입밖으로 흘리며 달려오던 돼지였습니다. 잘때도 항상 제 옆에서 베개를 베고 잤고 아침이면 꼭 알람보다 20분 일찍 골골송으로 저를 깨워 수면부족에 시달리게 하던 돼지였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사이는 갈라지지 않을거란 거만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건지 도저히 믿기지 않기를 일주일.
돼지는 이제 침대 밑에서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지만 저와의 관계는 룸메이트 따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저는 한번도 돼지를 키운다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가장 친한 친구이고 동반자이며 둘도 없는 가족이라 믿어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일주일 전 돼지에게 보기 좋게 손절당했습니다. 매 순간의 결정과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결과를 초래한다는 교훈을 인간관계가 아닌 인묘관계에서 배웠습니다.
그래도 불과 얼마 전 작게나마 발전이 있었습니다. 침대 위는 치사하지만 그 인간의 영역으로 남겨두겠다는 듯 얼씬도 않던 돼지가 경계하며 침대 위로 올라온겁니다. 잠도 제 옆에서 자는 걸 아직까진 무안해 하는 것 같고 침대끝에서는 본인도 조금씩 시도 중인 것 같습니다.
이쯤하면 돼지가 내민 화해의 발길로 봐도 무방한 거 맞겠죠? 저의 수백번의 손길보다 돼지의 한 번의 발길이 더 천금같은 우리 사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되던 순간이었습니다. 돼지가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 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길 바란단 걸, 너는 나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없어도 나는 너의 마지막을 함께 하려 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관계의 회복을 궁리하면서 이만 포스팅을 마칩니다.